제목 : 아멜리에(Le Fabuleux Destin D'Amelie Poulain / Amelie Of Montmarte, 2001) 감독 : 장-피에르 주네(Jean-Pierre Jeunet) 출연 : 오드리 또또(Audrey Tautou), 마티유 카소비츠(Mathieu Kassovitz), 루퍼스(Rufus), .........욜랜드 모로 (Yolande Moreau) 제작 : 독일,프랑스 / 2001.10.19 / 코메디,판타지,멜로 / 120분 삶을 다르게 읽는 즐거움 - 김동식 여운이 있는 웃음
「아멜리에」는 별다른 기대를 가지지 않고 본 영화였다. 헐리우드적인 코믹 멜로 물의 프렌치 버전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영화가 개봉되기 몇 달 전에 영화 잡지를 통해서 프랑스에서 8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로맨틱 코미디 물이며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과 비평가들의 냉정한 평가가 엇갈린다는 현지 통신원의 보고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 영화 비평계를 움직여가는『르 몽드』나『카이에 뒤 시네마』등을 비롯한 주요 언론은 이 영화에 대해서 '볼 가치가 없는 영화'라는 가혹한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현실의 사회적 문제들을 고스란히 배제한 채 동화 같은 외양을 하고 그저 작은 감정을 이웃끼리 나누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맹목적인 가치관을 전파한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1) 아마도 사회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영화들이 외면당하는 프랑스의 상황을 문제삼고자 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이 영화가 놓여져 있는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도 없고, 사실 그다지 알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관객이나 무섭게 질타하는 비평가 모두에게 어떤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갈 따름이다. 변방의 글쟁이가 뭘 알겠는가마는,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는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수작(秀作)이었다. 무엇보다도 무척이나 재미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이쯤에서, 웃어!'라는 강박적인 코드는 찾아볼 수 없는 영화였다. 황당한 상황을 극단적으로 과장하는 장면 속에 매설해 놓은 웃음의 격발 장치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편안한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영화의 재미는 사소한 사물들이 간직하고 있는 숨은 신비를 보여주는 여러 에피소드들로부터 주어졌고, 관객들의 웃음은 특정한 장면에 폭발적으로 집중되거나 하지 않았다. 객석 사이사이에서 작은 차이들을 내포하고 있는 웃음들이 시차를 두고 피어올랐고, 그 무엇보다도 웃음에는 말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여운이 감돌고 있었다. 우리의 사소한 일상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새롭게 인식하고 발견하는 데서 오는 웃음. 재미를 강요하는 천박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던 것이리라.
우연/운명/놀이
아멜리에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있는 열쇠말(key word)은 여러 가지이지만, 영화적 서사의 중심 축을 이루는 것은 우연과 운명 그리고 놀이이다. 아멜리에가 그녀의 삶에서 경험하는 우연들은 모두 사소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작고 사소하면서 우연한 사건들은 아멜리에의 운명으로 다가온다. 운명으로서의 우연은 존재의 가벼움이나 무거움이라는 관념적인 규정들을 피해가면서 삶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아멜리에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있는 열쇠말(key word)은 여러 가지이지만, 영화적 서사의 중심 축을 이루는 것은 우연과 운명 그리고 놀이이다. 아멜리에가 그녀의 삶에서 경험하는 우연들은 모두 사소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작고 사소하면서 우연한 사건들은 아멜리에의 운명으로 다가온다. 운명으로서의 우연은 존재의 가벼움이나 무거움이라는 관념적인 규정들을 피해가면서 삶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최초의 우연은 아멜리에의 탄생. 1973년 9월 3일 오후 6시 28분 32초, 1분에 14679번의 날개짓을 하는 나비가 파리 몽마르트 언덕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 순간, 수천만 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한 개의 정자가 난자와 우연하게 만난다. 그리고 아멜리에가 태어났다.
아멜리에의 유년을 규정하는 우연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버지의 오진. 의사인 아버지가 6살인 아멜리에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진찰을 했고, 평소에 안아주지도 않던 아버지가 자신을 만지자 너무 좋은 나머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고, 아버지는 아주 간단하게 '심장병'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혼자 집에서 공부한다.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죽음. 실연을 비관해서 노틀담 성당의 옥상에서 뛰어내린 캐나다 관광객에 깔려서 어머니가 사망한 것. 두 가지 우연은 아멜리에의 자폐적인 유년을 보여주는 운명의 표정이며, 유년기 동안 아멜리에는 '혼자서 공상'을 하며 지낸다.
아멜리에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있는 열쇠말(key word)은 여러 가지이지만, 영화적 서사의 중심 축을 이루는 것은 우연과 운명 그리고 놀이이다. 아멜리에가 그녀의 삶에서 경험하는 우연들은 모두 사소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작고 사소하면서 우연한 사건들은 아멜리에의 운명으로 다가온다. 운명으로서의 우연은 존재의 가벼움이나 무거움이라는 관념적인 규정들을 피해가면서 삶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최초의 우연은 아멜리에의 탄생. 1973년 9월 3일 오후 6시 28분 32초, 1분에 14679번의 날개짓을 하는 나비가 파리 몽마르트 언덕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 순간, 수천만 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한 개의 정자가 난자와 우연하게 만난다. 그리고 아멜리에가 태어났다.
아멜리에의 유년을 규정하는 우연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버지의 오진. 의사인 아버지가 6살인 아멜리에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진찰을 했고, 평소에 안아주지도 않던 아버지가 자신을 만지자 너무 좋은 나머지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고, 아버지는 아주 간단하게 '심장병'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혼자 집에서 공부한다.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죽음. 실연을 비관해서 노틀담 성당의 옥상에서 뛰어내린 캐나다 관광객에 깔려서 어머니가 사망한 것. 두 가지 우연은 아멜리에의 자폐적인 유년을 보여주는 운명의 표정이며, 유년기 동안 아멜리에는 '혼자서 공상'을 하며 지낸다.
성인이 되어 몽마르트의 한 카페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아멜리에의 삶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온 것도 우연이었다. 다이아나비의 사망 소식에 놀라 손에 쥐고 있던 구슬을 떨어뜨렸던 날 욕실 벽 뒤에서 잡동사니가 든 낡은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40년 전 그 상자의 임자였던 사람에게 몰래 돌려주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 기쁨을 주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체험하게 된다. 그 이후로는 남몰래 주변사람들의 삶을 훔쳐보며 그들에게 행복을 찾아주는 작은 모험을 펼쳐나간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아멜리에가 하는 놀이는 무엇일까. 마니또 게임과 몰래 훔쳐보기이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우연은 혼자 사는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가 지하철 역의 즉석 사진기에서 만난 남자 니노. 007 제임스 본드와 쾌걸 조로를 혼성 모방하면서 니노를 사랑의 게임으로 초대한다. 이 장면들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숨기듯이 자신을 드러내는 아멜리에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골적인 노출이 아니라 보여주면서 숨기고 숨기면서 보여주는 과정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보석'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멜리에게서 사랑은 숨바꼭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운명의 표정으로 다가오는 우연들을 대하는 삶의 방식이 아멜리에에게는 놀이로 이어진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운명은 사소한 우연의 모습으로 찾아들고 아멜리에는 그 속에서 삶을 꾸며나가는 놀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물수제비 뜨기처럼, 그녀는 초월이나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돌이 물의 수면을 스치며 통통 튀어 오르는 과정은, 아멜리에의 삶에 대한 메타포인 동시에 감독인 장 피에르 주네가 이 영화에 적용하고 있는 환상(fantasy)의 본질이기도 하다. 꿈이란 또는 환상이란 또는 삶이란 초월도 아니고 가라앉음도 아닌, 수면 위에서 가볍게 튀어 오르는 물수제비의 과정과 같은 것. 삶과 꿈을 바라보는 감독의 절묘한 균형감각이 아름답기만 하다.
행복의 위상학
아멜리에를 비롯한 영화 속의 인물들은 주변적이며 병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낭만적이어서 그렇지 따로 떼어놓고 보면 괴물스럽기까지 하다. 방안에 틀어박혀 르누아르의 회화만 모사하는 늙은 화가, 오래 전에 실종된 남편의 하염없이 편지를 기다리는 아파트 관리인, 한쪽 팔이 없는 야채 가게의 외국인 종업원, 늘 카페에 앉아 소일하는 동네 백수, 신경 쇠약에 시달리는 담배 장수, 실의에 빠져있는 3류 소설가, 종업원 놀리는 재미로 사는 야채 가게 주인 등등. 하나같이 허접하고 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아멜리에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일까. 아니다. 산타클로스는 저 멀리서 선물을 가져오는 사람이다. 산타클로스는 바깥에서 우연하게 주어지는 행복과 즐거움의 표상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만드는 아멜리에의 방법이란 놀이 또는 게임과 다르지 않다. 게임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행복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현재의 조건을 약간만 바꾸어 주는 것이다. 삶이 게임이라면, 삶이 재미없는 것은 게임의 규칙이 진부해서 그런 것이라면, 삶이라는 게임의 방식을 조금만 바꾸어주면 되는 것이다.
외출도 하지 않고 방안에서 르누아르의 그림만 모사하는 늙은 화가 듀파엘, 자신을 드러내려고는 하지 않지만 아파트 거주자들을 훔쳐보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그의 행복을 위해서 아멜리에가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연출을 통해서 훔쳐보기의 대상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도망간 남편의 편지를 기다리는 아파트 관리인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면 될까. 아파트 관리인이 가지고 있는 편지들로부터 하나의 편지를 만들어 주는 일이 그것. 편지는 아멜리에가 새롭게 쓴 것이 아니라 관리인이 수없이 반복해서 읽던 편지의 구절들을 다른 방식으로 배열한 것일 따름이다. 신경이 쇠약한 담배장수와 편집증적 기질을 가진 동네 백수는 모두 애정 결핍이다. 여자는 남자를 무시했고 남자는 다른 여자를 스토킹하고 있다. 문제는 간단하다. 두 사람의 시선을 서로를 향하도록 시선의 각도만 조정하면 되는 것이다. 출판사에서 딱지만 맞는 3류 소설가가 있다. 그를 위해서는 할 일은 무엇인가. 그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말고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영화「아멜리에」가 말하는 행복과 불행이란 '자리'의 문제이다. 장난감 상자가 40년 동안 욕실 벽 위에 숨어 있는 것과 이제 성인이 된 남자의 손에 주어져 있는 것의 차이이다.
행복은 소여(所與, 주어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적소(適所,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의 문제이다. 행복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마음먹기에 달린 것도 아니다. 욕망과 취향에 따라 삶의 규칙과 위치들을 바꾸어 보고 재조정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롭게 피어오르는 삶의 즐거움들을 음미하는 것. 물론 이러한 낭만적 생각이 얼마나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2시간 남짓한 영화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메시지를 찾는 일이란 얼마나 재미없는 게임일 것인가. 영화는 행복의 위상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을 따름인데.
삶을 다르게 읽는 시선들
영화「아멜리에」에서 우리가 얻는 즐거움이란 삶을 다르게 읽는 즐거움과 다르지 않다. 아멜리에가 좋아하는 것은 곡식 자루에 손 넣기, 물수제비 뜨기, 숟가락으로 파이 껍질 터뜨리기, 극장에서 사람 표정 구경하기, 영화 속에서 바퀴벌레 같은 옥의 티 발견하기, 지금 이 순간 몇 쌍이나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을까 상상하기 등등이다. 아멜리에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즐거운 게임으로 바꾸어 갈 수 있었던 원천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시선이다. 극장에서 스크린이 아니라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모습, 열정적인 키스 씬이 한창 진행 중인데 벽지를 타고 올라가는 바퀴벌레에 시선을 집중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아멜리에가 주변 인물들의 삶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정언 명령과는 무관하다. 영화의 메시지는 윤리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있을지 몰라도, 영화적 서사는 윤리적인 차원을 전제하지 않는다. 주변적인 것들을 읽어내는 아멜리에의 시선들에는 윤리적인 이유가 없다. 그녀의 시선 속에 자리하고 있는 지극히 긍정적인 '그냥'이 삶의 즐거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귀엽고 앙증맞은 삶을 살자'라는 메시지를 발송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삶을 다르게 읽어 가는 과정 속에서 삶의 즐거운 변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델리카트슨」,「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에이리언 4」를 거쳐온 감독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이 영화의 환상성이 이처럼 매력적인 것은, 아마도 주변적인 것을 응시하며 끊임없이 다르게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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